물고기란 없다 - 권고사직 받고도 회사에서 살아 남기

위가 아파서 집에서 재택을 하다가 권고사직 메일을 받았다. <죄송한 마음으로 어쩌구 쏼라쏼라 … 퇴직 위로금: n개월 분의 월급>. 바로 방에서 나와 “인주야 나 짤렸다!!!”하고 소리쳤더니 ‘끄하하하’하고 웃는다. 우선 정신을 차리자. 뭘 해야 할까. 24시간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폈다. 제목은 <{내 프로젝트} PoC까지 Fran의 팀 합류 제안>. 쓰면서 억억하는 소리가 식도에서 나왔다. 다 쓰고 자주 가는 바에 가서 데낄라 다섯 잔만 깔아달라 했다. 세 잔을 비울 때 바텐더가 괜찮냐며 이것도 좀 마시라고 토닉워터를 줬다. 두 잔을 냉큼 마시고 나왔다.

다음 날 대표를 만났다. 대표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위로를 먼저 건넸다. 흠, 미드에선 해고전문가는 미안하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던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퇴직 위로금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회사에 남아 일하고 싶다, 내 제안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니 PoC까지는 완료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낸 제안이라고. 합리적, 합리적, 합리적. 이성적으로 생각해. 현실을 계산해.

내가 대표에게 전한 역제안에 대해 낻은 말했다. “프란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방안을 합리적으로 회사에게 제시했네요.” 합리와 현실감각으로 가득 찬 댄이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서아는 “프란이 그 제안을 할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아, 어제 인사팀 이케가 1on1에서 경영진의 결정이라며 내가 회사에 계속 남아주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보통은 슬픔의 5단계를 거치는 데 프란의 제안은 충격적이었어요. 프란이 10년 뒤에 무엇을 하고 있을 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10년 뒤를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당장 1개월 뒤에도 몰라서 자취방 계약을 취소했는데. 슬프지 않았던 게 아니야. 슬퍼도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을 뿐이야.

근데 그게 슬퍼도 해야할 만큼 중요한 프로젝트일까? 내가 내 일을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술에 절어진 채 새벽 다섯 시에 가족들을 깨워서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울어도 해야할 만큼인가. 내 앞으로의 커리어에는 분명 합리적으로 옳은 선택이지만 버스 안에서 쿵쾅거리는 마음을 버텨야 할만큼, 회사에 도착해서는 웃음 짓기 위해 노력할 만큼일까. 무너지지 않기 위해 도와달라고 친구들을 걱정시키는 문자를 남길 만큼?

치가우(요즘 일본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보고 있다)! 나는 담배피면서 로폴아에게 얼마 전 읽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감상을 말해주는 게 좋았어. 루카스랑 사무실에 남아 “왜 우리는 금요일 밤 아홉시 반에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거야?”하며 웃는 건 즐거웠어. 술에 취해서 은수에게 LLM에 대해 회사에서 진행한 세션 내용을 설명하는 게 좋아(착한 은수). 나는 최대의 합리를 사용해서 감정을 누르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좋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세계에서, 차갑고, 더럽고, 무서운 세계에서 계속해서 재밌게 살 거다. 정말 난 재밌는 것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끝까지 하려고.

권고사직 메일을 받고 다시 남아달라는 말을 듣게 된 3주 간 정말 뒤지게 힘들었다. 이번 글은 내가 대표에게 전한 말로 마쳐야겠다.

이는 회사와 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이라고 판단하면서 제안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